세상나눔 공간


2024 한마음 야학 잡지, <I'M> vol.1 인터뷰 전문_02 (상아탑반 김영순)

김채린
2024-08-27
조회수 63

김영순 어머님 인터뷰

 

2024년 8월 11일, 대전 관저동에 있는 카페에서 상아탑반 수업을 듣고 계신 ‘김영순 씨’와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2023년 8월에 지혜반에 입학하여 2024년 4월 검정고시 합격 후 상아탑 반에서 수업을 듣고 계신 ‘김영순 씨’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른 후 인터뷰 전날 태백산 바람의 언덕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찾는 중이라는 김영순 씨는 누구보다 열정이 넘치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 점심을 함께 먹으며 지나온 삶의 궤적들을 간단하게 듣고 잡지 편찬의 목적에 대한 설명해 드렸다. 김영순 씨의 지나온 삶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행자: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영순: 반갑습니다. 저는 한마음 야학에서 지혜반 통과한 후 상아탑 반에서 수업을 받고 있 는 김영순입니다.

 

진행자: 저희 그래도 꽤 인연이 있죠? 지혜반에서 좋은 추억들이 많았었는데, 다시 만나니 너 무 좋네요.

김영순: 네, 맞아요. 그래서 너무 좋은 것 같아~

 

진행자: 이제부터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릴게요. 편안하게 이야기 해주시면 돼요. 먼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김영순: 가족관계는 나랑 아들 둘. 아들 둘 다 결혼했으니까 큰 아들의 며느리와 손녀딸 그리 고 작은아들의 며느리와 손자 한 명, 손녀 한 명이 있어요.

 

진행자: 엄청 대가족이시네요. 홀로 두 아들을 키우시면서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김영순: 엄마가 혼자 키우다 보니까 아빠에 대한 부재로 아빠의 역할을 못 해줄까봐······. 아 이들이 아빠에 대한 사랑도 필요한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까봐 걱정되었죠. 아이들 어릴 때 아빠가 돈 까먹고 도망갔거든요. 그래서 내가 빈손에서 월세 6만원으로 시작 해서 키웠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친정엄마한테 10만원을 빌려서 방세 6만원을 주고 가게에서 밥그릇 세 개, 국그릇 세 개, 숟가락 세 개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고생이라 기보다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놓고 저녁에 집에 오면 아이들이 눈앞에 있다는 것만 큼 행복한 것은 없더라고요. 김치 한 조각 가지고 먹어도 서로 앞에서 쫑알쫑알 거리 면서 이야기하는 거 자체가 너무 좋아서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아들둘 이 이제는 묻더라고요. ‘우리 둘을 대체 엄마 혼자 어떻게 키웠어?’ 이래서 ‘왜?’이러 니까 자기는 하나 키워도 힘들어 죽겠대(웃음) 지금 아들들이 엄마한테 진짜 잘하거 든 근데 아마 그런 게 힘들다는 내색을 안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학교 갔다 오면 좋고 눈앞에 보이면 좋고~

 

진행자: 어떤 일을 하시면서 아이들을 키우셨던 거예요?

김영순: 아이들이 학교에서 혹시 문제가 있으면 엄마가 언제든지 학교를 다녀와야 되니까 영 업직을 선택했어요. 왜냐하면 영업직은 자유로우니까.

 

진행자: 그때부터 퇴직할 때까지 쭉 같은 일을 하셨던 건가요?

김영순: 아니요. 영업직을 하다가 학습지 영업을 했어요. 나는 공부를 못했지만 영업하곤 상관 이 없잖아요. 가르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내가 그걸 왜 선택을 했냐면 혹여나 내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선택을 했어요. 그때는 내가 아 무 능력이 없으니까 보통의 다른 사람들은 월급이 셌던 식당을 많이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묶여있는 것이 싫어서 선택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언제든 부르면 언제든 가야되니까. 낫 놓고 기역자라도 내가 눈으로 보면서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아이들에게 전달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게 되었어요.

 

진행자: 그때부터 지금까지 학습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으셨군요.

김영순: 늘 있었어요. 40대 중반에 학습지가 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수입이 안 되니까 그만두 고 중고 승용차를 구입해서 노점장사를 했어요. 장날을 돌아다니면서 길거리에다 돗 자리 펴고 거기다가 물건 놓고 장사를 했어요. 양말도 팔고 속옷도 팔고 치약, 칫솔 도 팔고~ 이러다가 트럭을 사서 세제도 팔러 다니고 했어요. 안 해본 것도 없어요. 그때는 아이들 삼사분기 육성회비를 냈어야 했어요. 선생님 때도 그런 거 냈었나?

 

진행자: 아니요 저희 때는 그런 거 안 냈어요.

김영순: 우리 아들들은 그걸 다 냈어요. 3개월에 한 번씩 34만원인가를 냈어요. 그때는 급식 도 안 해서 새벽에 매일 도시락 5개를 싸기도 했어요. 큰 아들은 도시락 3개, 작은 아들은 도시락 2개. 매일 5개를 쌌어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주고 학교 보내고 나면 장 나갔다가 오고. 그렇게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로 넘어가고 대 학교로 넘어가니까 학비를 대려고 하니 수입이 나올 때가 없으니까 저녁에 (카페 전 구를 가리키며) 이 전구를 노점상에 가서 사왔어요. 지금은 led지. 우리 학교에 보면 전구 끼우는 거 있죠. 그거를 밤에 돌아다니다 보면 식당이나 그런 데 불이 꺼진 데 있으면 내가 그걸 갈아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어요.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서 했던 거예요.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 상인들이 전구 하나 두 개 갖고 바빠서 못 가니까 나는 1000원에 전구를 사와서 갈아주는데 2500원을 받는 거지. 그럼 그 사람 들은 시간을 절약하고 나는 돈을 벌고 좋죠. 그래서 하루 저녁에 수입이 3~4만원 정 도 되었어요.

 

진행자: 정말요? 돈이 꽤 많이 되네요.

김영순: 작은아이가 사립 대학교를 들어가니까 학비 감당하려고 매일 그런 일을 했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일을 한다는 것을 아들에게 말을 못했어요. 아들이 힘들어할까봐. 근데 선생님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아들이 그렇게 자기 진로를 찾아서 간 다는 게 자체가 너무 고마우니까 힘들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어요. 그냥 했어요. 그런 데 대학교 1학년이 되고 나니까 자기들 철이 들어서 ‘엄마 나 군대 갔다올래.’ 하더 라고요. 그 후에는 제가 걱정 안했어요. 그래서 자식을 키우면서 힘들다는 것보다 너 무 고맙고 감사하다. 그 생각을 항상 했어요. 단지 내가 지금도 미안한 것은 먹는 걸 제대로 못 챙겨줬던 거예요.

 

진행자: 매일 도시락 5개나 싸주셨는데도 아쉬움이 남으세요?

김영순: 아무리 도시락을 싸줘도 지금처럼 고기를 싸주지는 못했죠. 영양보충이 잘 되지 않는 음식들만 싸줬어요. 수입이 크지 않으니까. 지금도 고기를 막 사주고 싶어요. 자기들 은 사실 나보다 더 잘 먹겠지만서요. 또 아쉬운 건 나는 내가 없었던 거죠. 살면서 어느 날 ‘내가 어디 갔지?’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가 왜 없어졌지?’, ‘나 어디갔 어?’ 하고 찾을 때가 있어요.

애들이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는데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내 생에 한 번 51살 때 8개월을 쉬었어요. 허리가 협착이 심해서 다리가 걷지를 못했어요. 8개월을 쉬면서 갖은 노력을 많이 했죠. 그때 우리 큰 애가 임용 시험을 본다고 할 때고 작은 애는 군대를 가있던 때였어요. 큰 애는 임용이 한 번 떨어지고 두 번째 또 떨어졌어 요. 또 떨어지고 나서 아픈 몸에 아들이 엄마가 아픈 걸 보면 수험을 포기할 것 같아 서 친구들한테 천만 원을 빌려서 서울 노량진에 보냈어요. 아들한테 말도 안하고 엄 마가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어요. 다른 게 아니고 그냥 네가 자꾸 임용에 떨어지니까 지금까지 학원에도 못 보내줬는데 엄마 원하는 대로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해 보거라. 그래도 안 되면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1년간 공부를 해보라고 했어요. 엄마가 돈이 어딨냐는 말에 ‘아니 괜찮아 엄마가 충분히 준비를 해놨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1000 만원을 줬어요. ‘이거 다 쓸 때까지 공부하고 와. 그래도 네가 또 안 되면 그건 너의 길이 아니다 생각하고 다른 선택을 해보자.’라고 하니까 본인도 답답하니까 ‘엄마 한 번 해볼게.’하고 가고 그제서야 나는 이제 맘껏 아파했어요. 나중에 아들이 800을 딱 쓰고 내려왔더라고요. ‘엄마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그러기에 그럼 남은 돈 너 쓰라고 하니까 친구하고 여행 갔다 오더라고요. 갔다 와서 그 다음에는 합격해서 지 금 충남 천안에 있어요. 얼마나 다행이야. 작은 아들은 3학년 때 복학해서 회계사를 합격했어요. 한양대를 다녔는데 3학년 때 합격을 하고 졸업 하기도 전에 회사에서 스 카웃을 해서 회사를 다녔어요. 취직을 하고 월급을 타니까 자기가 알아서 밥벌이를 하더라고요.

 

진행자: 너무 뿌듯하셨겠어요. 이후에 어머니는 무엇을 하셨나요?

김영순: 그렇죠. 나는 그쯤에 아프고 나서 보훈청 있지 당시 이명박인가? 취업을 많이 시켜야 되는 제도가 있었어요. 그게 국가 유공자들 예우 차원에서 요양보호사 비슷한 일을 하는 게 있었어요. 거기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됐어요. 처음에는 월급이 적 었고 출근하는 날만 일당제로 줬어요. 월급이 적어도 나는 저녁에 알바를 하면 되니 까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거기는 아침 9시부터 저녁6시까지만 일 하면 되니까 저녁 에 충분히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도 월급이 너무 적어서 고 민을 하니까 큰 아이가 다독이면서 ‘이제 엄마만 먹고 살면 돼 우리는 걱정 하지 마.’하고 그렇게 나를 다독이는 거예요. 영업은 어쨌든 자기 실적대로 쌓이니까 내가 노력한 만큼 쌓였지만 이건 한 달에 100만원도 안되니까 사람이 환장하겠는 거예요. 그렇게 계속 걱정을 하니까 큰 아이가 계속해서 다독여주면서 ‘엄마 이제는 엄마만 먹고 살면 돼. 우리는 걱정 하지 마. 엄마 이제 일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우리 봐서 라도 힘든 일 하지 마.’ 이렇게 계속 다독여주더라고요. 그렇게 한 달 없는 10년을 다녔어요. 작년 퇴직 할 때가 딱 한 달 없는 10년이었어요. 지나오니까 월급도 개선 이 되고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어요. 그 중에 아들 둘 결혼도 시키 고 여러 가지······. 이렇게 지나왔어요.

 

진행자: 나를 잃어버렸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김영순: 내가 퇴직하고 야학에 바로 가게 되었잖아요. 내 머릿속은 늘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나는 나를 찾고 싶었어요. 내가 나를 너무 찾고 싶은 거예 요. 가끔 친구들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뭐지?’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 면 그때부터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말도 없어졌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사는 이 야기 좋다 나쁘다 하는데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거 있죠. 생각 보다 내 주변에서 내게 연락이 오는 편이에요 내가 말을 들어주니까 나를 찾는 것 같아요. 어느 날 ‘내가 왜 들어야 돼? 나도 힘든데. 저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얼마나 들어줄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언니, 친구 포함해서 5명 있는데 ‘당신들은 나 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물어봤어요. 다들 벙 찌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어 요. 한 명 한 명에게 ‘나는 너희 집 밥숟가락 개수까지 알아. 너는 나에 대해 뭐를 알아?’라고 하니까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되게 뭐라 했어요. ‘나한테 집 안 얘기, 가정 얘기, 부부 얘기 다 털어놓을 때는 되게 시원하지? 근데 나는 당신들 개운한 만큼 반비례해서 내게 쌓였어. 그니까 앞으로 하지 마. 앞으로 안들어줄거야. 그리고 앞으로 나에 대해서 좀 알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 라고 했어요. 그런 데 그게 쉽게 바뀌냐고. 안 바뀌죠. 그 다음부터 분명히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속 자기 얘기만 하니까 그 자리에서 뒤도 안돌아보고 가버렸어요. 뒤에서 불러도 돌아도 안 봤어요. 그걸 몇 번을 했어요. 다음에 만나서 그때 왜 그랬냐 하면 나 너무 힘드 니까 들어줄 수가 없다고 다시 한 번 이야기 했어요. 나한테 쌓인 상처는 어디 가서 치유하냐고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조금씩 떨어지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너 무 좋았어요.

그때부터 나를 찾으려고 도서관을 많이 갔어요. 어려운 책은 못 읽지만 소설책이라도 보려고 했어요. 특히 김진명 소설이랑 아리랑, 태백산맥 쓴 사람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들 책은 집에 거의 다 있어요. 특히 조정래 소설가 책은 거 의 다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눈이 많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책이랑 멀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안경을 썼는데 그게 너무 속상한 거예요. 눈이 나빠져서 안 경을 쓰니까 작은 아들이 막 울었어요. 속상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책도 못 보고 어 떡해.’ 하면서 울었어요. 그래도 불편한 눈으로도 계속 책을 보면서 언젠간 꼭 배워 야지 다짐했어요. 배움의 길을 물론 찾으려면 빨리 찾았겠지만 먹고 사는 일에 치여 잊어버렸었거든요. 퇴직하기 전 중간에 야학을 2번 갔다고 했잖아요. 교감선생님이 룰이 뭔지 알려줬더라면 그때 시작을 했을 텐데 ‘아무 때나 오세요.’ 그 말만 하셨어 요. 다른 말이 없어서 어려우니까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가 퇴직하기 전 다짐을 했어 요. 퇴직하면 꼭 와야지. 하고 먼 길을 이제야 오게 됐어요.

 

진행자: 먼 길을 걸어 야학에 오시게 되었군요. 야학에 오니 어떠셨어요?

김영순: 너무 좋은 거 있죠. 수업을 듣는데 정말 좋아서 날아갈 것 같은 거예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거예요. ‘행복이 따로 없다. 이게 행복이구나.’했어요. 진짜 행복했어요. 내 가 홀로서기를 잘한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당연히 내 삶은 내가 개척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14살 때부터 내 삶을 찾으려고 혼자 부산에 가기도 했으니까 저는 제가 홀로서기를 참 잘한다고 생 각해요.

 

진행자: 나를 찾기 위해서 퇴직하고 야학에 온지 8개월이 지났는데 본인을 찾은 것 같으신가 요?

김영순: 나를 찾기는 아직 멀었어요. 일단은 내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죠. 공부 를 하면서 치르게 되는 시험도 하나의 성취감이잖아요. 졸업장이 없어도 먹고사는 데 는 문제가 없지만 나 자신에 대한 욕심. ‘나도 할 수 있어. 나는 해낼 수 있어.’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스스로 많이 성장했어요. 물론 지금 합격할지 미지수이긴 하지만(웃 음). 상아탑반에서 수업한 지 3개월 만에 합격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나는 또한 편해지기도 했지만 아직은 야학 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떨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행자: 야학 졸업하면 하고 싶은 게 있나요?

김영순: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나면 복지 서비스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애기 엄마들이 애기를 맡길 때가 많지 않아서 많이 힘들어하잖아요. 그래서 저출생이 심해 지기도 하고. 제가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우리나라가 노령인구가 많잖아요. 제가 보 훈청 어르신들 상대로 복지 서비스를 하면서 느끼고 배운 것은 고령화시대니까 노인 일자리를 엉뚱한 데 하지 말고 우리 같은 나이의 사람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은 거 예요. 우리 나이가 되면 애기들이 너무 예뻐요. 그런데 사회 정서적으로 아이들을 함 부로 만질 수가 없는 분위기잖아요. 그런 게 많이 아쉬운 게 있어서 제가 만약에 공 부를 하면 복지서비스를 더 배우고 싶어요. 저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은 퇴직하고도 일자리가 필요하잖아요. 그러면 유치원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을 노인정에 데려다 주 면 노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좋겠다는 바람이 커요. 제가 복지서비스를 해보니까 어르신들을 돌보니까 알겠는 거예요. 80이 넘으면 다 애기들 이에요. 예쁘다고 해줘야 좋아하고 잘했다고 해주면 좋아하고 애들도 마찬가지죠. 그 런 체험을 하면서 우리 나이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으니 아이들이 올 때 사랑 으로 감싸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죠. 그럼 엄마들은 마음 편하게 일을 하고 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는 이런 제도가 진짜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저는 이게 늘 어딘가 말하고 싶은데 아직 제가 이런 걸 아무것도 모르니까. 생각만 하다가 선생 님한테 처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제도가 있으면 앞으로 저출생에도 기여하고 자 라나는 아이들도 따뜻하게 클 것 같아요. 사랑으로 키우니까. 일을 떠나서 너무 예쁘 잖아요. 젊은 선생님들처럼 그림을 그리고 활동적인 것을 많이 해줄 순 없겠지만 옛 날 이야기를 해주든 장난감으로 놀아주든 하면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 속 에 늘 있어요. 노인 일자리 쓰레기 줍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조금이라도 보람이 있는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을 하는 게 좋 지 않을까 생각을 많이 해요. 요즘 애들이 폭력적이다 뭐다 뉴스에 많이 나오는데 그 렇게만 말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키우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만약에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고 조그만 씨앗이 내가 말을 함으로써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옮길 수도 있고 하다보면 언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진행자: 꿈이 있다는 게 너무 좋네요. 실현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김영순: 꼭 할 거예요. 그런데 어저께 점수 보니까······.(웃음) 그냥 내년에 한 번 더 보고 점 수 높아지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진행자: 어머님이라면 꼭 해내실 것 같아요. 꿈 이야기를 하니까 너무 행복해보이시네요.

김영순: 나 요새 살아있는 것 같아요 .친구들이 나보고 요즘 뭐라고 해요. 이제 편안하게 쉬지 뭐하러 야학에 가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백이면 백 다 하는데도 그냥 나는 너네 는 너네 방식대로 놀아. 나는 나대로 놀게 하고 말아요. 그리고 평생 일했으니까 쉬 는 게 쉬는 것 같지도 않아요.

 

진행자: 그럼 야학에 오지 않는 시간들은 어떻게 보내세요?

김영순: 아침마다 구봉산 산행을 2시간을 꼭 해요.

 

진행자: 산을 좋아하세요?

김영순: 그냥..어디를 가서 운동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잖아요. 에어로빅을 다닌다든지 헬스를 다닌다든지 하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냥 산을 가는 거예요. 산에 가면서 라디오 를 끼고 다녀요. 라디오는 들을 게 되게 많잖아요, 그냥 내 일상이 그래요.

 

진행자: 저도 매일 운동해야지 하면서 안하는데 참 대단하세요. 긍정적인 사고로 열심히 사시 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요.

김영순: 저는 아직도 저를 잘 모르긴 하지만 가끔은 사람들이 제게 ‘나는 너처럼 그렇게 못 해.’라고 할 때가 있어요. 저는 그 뜻을 몰랐어요. 또 가끔은 제게 ‘얼음같이 차갑다’ 는 이야기도 많이 해요. 그런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살아야 되니까. 대신에 나는 남한테 피해 주진 않아. 나는 남한테 상처주기 싫어. 내가 좀 더 양보하고 배려 하지 뭐. 그렇지만 나는 최선을 다 할 거야. 하는 게 있어요.

 

진행자: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긍정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다보면 결 과에 대한 후회도 많이 없으실 것 같아요.

김영순: 결과에 대한 후회도 없어요. 물론 사람인지라 후회할 때도 있지만 길게는 안가요. 그 건 내가 어쩔 수 없었구나. 하고 말아요. 굳이 매달리지 않아요. 매달리면 내가 힘드 니까. 스스로 위안하죠. 그렇게 할 때는 책을 들어요. 책을 들면 밤새 봐요. 끝장까지 다 봐요. 그럼 잡념이 다 없어져요. 아침이 되면 피곤해서 헤롱헤롱 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냥······. 고민했던 게 책하고 바꿔지는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맞아. 이래도 괜찮아~’ 혼자서 이래요.

 

진행자: 최근에 읽었던 책은 무엇인가요?

김영순: 학교에서 읽었는데 제목은 잊어버렸어요. 갈 때마다 조금씩 보는 책인데, 그거 말고 최근에 본 것은 유홍준 작가의 여행 관련 책을 읽었어요. 내가 어디 여행을 가고 싶 으면 그 책을 보면 참 좋아요. 그 안의 내용들이 유적지 찾는 데 되게 도움이 돼요.

 

진행자: (핸드폰 검색을 해보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이건가요?

김영순: 거기 1권이 전라도예요. 저번에 그거 읽고 다녀왔어요. 최근에 읽은 또 다른 책은 김 미경 작가의 책이에요. 강의 많이 하러다니는 사람. 살아있는 뜨거움이란 책이에요. 그게 6월달쯤 읽었을 거예요.

 

진행자: 유홍준의 책을 읽고 전주에 다녀오셨다고 하셨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 있나요?

김영순: (사진을 보여주며) 어제는 제가 시험 보고나서 남원도 백두대간 바람의 언덕 알죠? 풍 력발전소 있는 곳 여기를 다녀왔어요.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다 배추예요.

 

 

진행자: 와 너무 좋으셨겠어요.

김영순: 나를 위한 여행을 많이 했죠. 그 동안은 나를 못찾았으니까(웃음) 나를 찾아서. (지리 산 대원사 사진을 보여주며) 이건 4월 18일에 지혜반 시험 끝나고 다녀온 여행 사진 이에요. 여기가 대원사예요. 여기부터 시작해서 네비를 찍고 돌아보고 온 거예요. 만 원 내고 글도 쓰고 왔어요. 대원사 갔다가 청학동 가서 민박을 했어요. 민박을 하고 나니까 옆에 이런 데가 있더라고요. 여기 가면 볼 만하다고 했어요. 작년부터 저는 저를 위해서 여행을 하면서 저를 찾으러 다니고 있어요.



진행자: 다음 약속이 있으신가봐요. 슬슬 마무리를 짓도록 할게요.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나에 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김영순: 지금 내가 어린 시절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욕심을 부리라는 말이에요. 왜 그렇게 양보하면서 살았니 하고 묻고 싶어요. 그 말은 꼭 하고 싶어요. 너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 너를 위해서 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사실지 금은 그 아픔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그 아 픔이 있었기에 그걸 내가 잘 견디고 살아오지 않았나 생각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