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나눔 공간


2024 한마음 야학 잡지, <I'M> vol.1 인터뷰 전문_03 (동문 김성순)

김채린
2024-08-27
조회수 109

김성순 총무님 인터뷰

한마음 동문회 총무직을 맡고 있는 ‘김성순 씨’와의 인터뷰는 2024년 8월 5일, 대전 목동에 있는 모 카페에서 진행하였다. 인터뷰 당일은, 김성순 씨가 생애 처음으로 청약 받은 본인 소유의 아파트를 계약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감격스러웠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축하드린다. 그녀는 동문회 총무로서 동문회 모임, 교사 연수, 야학의 각종 행사에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헌신한다. 인상적이다. 첫 인터뷰를 김성순 씨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이다. 본 인터뷰와 [‘I’m’] 편찬 목적 및 의의를 설명해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마음 야학 동문회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삶에 대해.


진행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성순: 저는 한마음 야학 동문회 총무를 맡고 있는 김성순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계면적인 웃음). 말을 잘 못해서요....

 

진행자: 편안하게 하시면 됩니다. 제가 몇 가지 사항들을 질문 드릴께요. 평소에 대화하듯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먼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김성순: 큰 딸과 늦둥이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2남 1녀이지요. 큰 딸과 늦둥이 쌍둥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띠동갑입니다.

 

진행자: 아이들을 늦게 보셨나봅니다.

김성순: 예! 제가 42살에 쌍둥이를 낳았어요.

 

진행자: 그렇군요. 자식 분들은 모두 장성하셨겠네요.

김성순: 예! 딸은 서울에서 회사원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제 앞가림을 잘 하고 있어 대견해요.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 쌍둥이 아들들은 대학생인데, 휴학하고 지금은 둘 다 프로게이머 되겠다고 하루 종일 게임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군대도 안 가고요...

 

진행자: 엄마로서 걱정이 좀 되시겠어요.

김성순: 물론, 걱정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식들을 믿고 응원해 주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옳은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살지 못했거든요.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고요.

 

진행자: 예! 저도 동의합니다. 혹시 하시는 일은 무엇인지요?

김성순: 호수돈 여중·고와 서대전 초등학교 근처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어요.

 

진행자: 혼자서 운영하시는 가게인가요?

김성순: 네! 작은 가게랍니다. 가게를 운영한 지는 약 8년 정도 되었는데, 그때는 학생들이 많아서 바쁘게 일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이 많지 않아서 혼자서 운영해도 충분해요. 이 일을 하다 보니, 초등학생 수가 줄어드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요. 서대전 초등학교의 경우, 작년만 해도 한 반에 19명씩 세 반이었는데, 지금은 13명씩 세 반이라고 해요.

 

진행자: 그렇군요! 인구 감소가 총무님 사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네요. 하하

김성순: 그래도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즐겁게 일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해 먹이면서 바라보는 일상의 행복감이요. 특히 초등학교 다닐 때는 착했는데, 중학교 가서 담배 피우고 엇나가는 학생을 불러 이야기해주고 토닥토닥 하는 재미도 있고요. 다행히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 없이 좋고요.

 

진행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성순: 예! 그동안 정들었던 학생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 중에 마음 가는 한 남자 아이가 있었어요. 우리 가계에 와서 떡볶이도 맛있게 먹고, 정말 착한 아이였어요. 외모적 콤플렉스가 있기는 했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엇나가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원인은 아마도 중학교 같은 반 학생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떡볶이 먹으러 오라고 했죠. 몇 번 말했더니 오더라고요. 음식을 차려주고 학생과는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몇 번 나누었어요. 처음에는 쭈뼛쭈뼛 하다가 나중에는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빠하고 누나와만 살고 있다고 했어요. 엄마는 없다고. 집에서는 방임되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다닐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중학교 들어가서 다른 학생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따돌림을 하니, 자신이 우월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담배를 피우고 어긋난 행동을 하게 된 것 같았어요. 2년 동안 지켜보면서 지나갈 때마다 인사하고 좋은 말을 건네주었죠. 좋아지는 것 같았어요. 학생들을 만나다보니 자주 보는 학생들의 가정사를 많이 아는 편이예요.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자기편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진행자: 정말 공감합니다. 진정, 어른 역할을 해 주셨네요. 감동입니다. 그런데 하시는 가계의 시그니처 메뉴는 무엇인가요?

김성순: 학생들 상대로 하는 분식집이니 메뉴야 똑같죠. 그래도 토스트, 떡볶이, 어묵 등은 제가 직접 육수와 소스를 만들고 있어요.

 

진행자: 총무님 음식 솜씨야 제가 잘 알지요! 가끔 교사 연수에 음식 싸 들고 오시잖아요. 정말 맛있어요. 그럼 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한마음 야학과 어떻게 인연이 되셨나요?

김성순: 공부에 한이 맺혀서 혼자 독학으로 중등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시험을 보러 갔었어요. 검정고시 시험장에서 한마음 야학 학생들을 만났지요. 어떻게 오셨냐고 서로 묻다가 한마음 야학을 알게 되었어요. 시험을 치르고 야학을 바로 찾아갔어요. 중등 검정고시 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교감 선생님이 바로 고등부로 들어가라고 하셨어요. 다행히 결과가 좋아서 야학에서는 고등부(상아탑반) 공부를 함께 했어요.

 

진행자: 놀랍네요. 혼자 독학으로 중등 검정고시를 합격하신 것인지요?

김성순: 네! (웃으며)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니까요.

 

진행자: 정말 대단하십니다.

김성순: 만약 시험장에서 한마음 야학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고등 과정도 독학으로 했을 것 같아요. 힘들었겠죠. 어쨌든, 우연히 한마음 야학을 알게 되어 정말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야학은 언제부터 다니셨나요.

김성순: 2019년 4월에 야학에 입하해서 일 년을 다녔어요. 식당일 때문에 1교시는 못 듣고 2교시 수업만을 들었어요. 그래서 못 만난 선생님도 많이 계셔요.

 

진행자: 공부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요?

김성순: 다 좋았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음~~ 방학 때 선생님들께 편지를 썼어요. 장재혁 선생님, 신현섭 선생님, 김태광 선생님, 구자승 선생님, 그리고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들께요. 선생님들이 좋아하셔서 기분 좋았습니다. 특히 장재혁 선생님이 ‘러브레터’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셔서 너무 기뻤습니다. 신현섭 선생님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수학을 가르치셨는데 저희가 잘 이해하지 못하니깐 온 몸을 이용해서 춤을 추듯이 가르쳐 주셨어요. 학생들끼리 사소한 분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행복했어요.

 

진행자: 졸업은 언제 하셨죠.

김성순: 2020년에 졸업했어요. 코로나 때문에 야학교에 모여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졸업식을 했어요. 많이 속상했어요. 우리 야학이 언제나 중구청 강당에서 성대하게 졸업식을 했잖아요. 사람들도 많이 오고. 그 모습이 정말 좋았는데. 몇 몇 선생님들과 졸업생들만 소수 모여서 소소하게 졸업식을 했어요. 상황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지 못해 조금은 쓸쓸한 졸업식이라 서운했어요.

 

진행자: 그렇군요! 저는 매년 하는 행사라서 잘 인식하지 못했어요. 코로나 시절에 졸업하신 학생들은 그런 아쉬움이 있었겠네요. 그럼 본격적으로 동문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성순: 동문회는 졸업 이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여했어요. 그러던 중 이전 총무님(최향숙 씨)이 주로 야간에 일을 하게 되면서 동문회 총무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요. 홍성창 동문회장님이 후임 총무를 물색하던 중, 제가 제일 어리다(?)는 이유로 총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하

 

진행자: 그럼 총무직을 언제부터 하셨나요.

김성순: 2022년부터 시작한 것 같아요.

 

진행자: 총무직 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신지요.

김성순: 제가 너무 소심하고 내성적이라서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잘 못해요. 회장님이 시켜서 억지로 하라는 것만 했죠. 그런데 하다 보니 조금씩 저의 성격도 바뀌더라고요. 사실, 저는 원래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욕심도 많아요. 부끄럽지만, 언제든 필요할 것 같아서 노래 강사 자격증도 땄어요. 그리고 예전에는 한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스피치 강좌를 듣고 자격증도 땄어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별 쓸모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총무하면서 나아진 것 같아요. (하하) 그래서 지금은 동문들과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 맺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어요. 어려운 점은 딱히 없어요. 오히려 선생님들과 동문들이 모두 내 편이 된 것 같아 너무 기뻐요. 살아오면서 평생 내 편이 없었거든요.

 

진행자: 살아오면서 평생 내 편이 없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무슨 의미인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 까요.

김성순: 아빠 엄마가 동성동본이라서 헤어졌대요. 나중에 커서 들었어요. 저는 엄마가 ‘이모’인 줄 알고 자랐고요. 외할머니가 저를 키우셨거든요. 복잡해요.

 

진행자: 예전에는 동성동본 결혼이 금지되었었다는 사실을 저도 알고는 있었어요. 안타깝네요. 정말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좀 더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김성순: 외할머니가 딸만 줄줄이 낳으셨대요. 딸만 여덟 명을 낳았다고. 하하. 그 중 제 엄마가 다섯째여요. 아들이 없으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데릴사위를 얻으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엄마가 딸들 중 가장 똑똑하고 착해서 데릴사위를 받으셨대요. 결혼식을 올렸고, 저를 낳았겠죠. 그리고 저를 출생신고하려니 먼저 혼인신고를 해야 했겠지요. 옛날에는 혼인신고나 출생신고를 늦게 하고 그런 게 흔했잖아요. 어쨌든 아빠 엄마가 혼인신고를 하려고 하는데, 동성동본이라 나라에서 혼인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대요. 그래서 두 분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지셨다고 해요. 그리고 각자 새 삶을 찾으셨대요. 저는 외할머니께 맡겨진거죠.

 

진행자: 그럼 출생신고는 어떻게 되셨나요.

김성순: 저는 1961년에 태어났는데, 출생신고는 1963년으로 되어 있어요. 외할머니가 그런 행정 처리를 잘 알지 못하셨을 것이고, 아무도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지요. 나중에야 제가 호적을 보고 안 사실이에요. 더 황당한 것은, 아빠 이름 칸에는 정상적으로 제 아버지 성함이 호적에 올라있는데, 엄마 이름 칸에는 제 외삼촌 성함이 있었어요. 외삼촌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진행자: 황당하네요. 이런 사실을 언제 아셨나요?

김성순: 가족 관계 증명서가 필요해서 몇 년 전에 띄어 봤더니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진행자: 살아오시면서 불편함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김성순: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은 주민등록증이 나오는데 나는 주민등록증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집안 어른들께 여쭈어보니, ‘출생신고는 되어 있으니 기다려 보라’고 하셨어요. 마냥 기다리고 있으니, 나오기는 나오더라고요. 2년 후에. 하하. 아마도 제 서류가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더 재미있는 이야기 해 드릴까요?

 

진행자: 예!

김성순: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취학 통지서 같은 것이 특별히 없었던 것 같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촌이라서 그랬는지. 어쨌든 나이가 되어 동네 친구들과 국민학교에 입학했어요. 지금은 초등학교죠. 친구들 가니깐 따라 간 거죠. 재미있게 잘 다니고 졸업까지 했어요. 물론 졸업장도 받았어요. 그런데 몇 년 전,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초등학교 졸업증명서가 필요하게 되었어요. 졸업장을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살면서 이리 저리 이사 다니면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졸업한 초등학교에 가서 졸업증명서를 부탁했죠. 그런데 제가 명단에 없다는 거여요. 호적에 올라간 이름과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달랐던 거죠. 저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학교를 다녔고, 서류들은 호적에 올라간 이름으로 되어 있었던 거예요. 출생신고는 아버지가 하고 양육은 외할머니가 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분명 존재했지만, 기록상으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담당자에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학교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들을 두 명 정도 데려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기록상에만 존재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증언해 줄 수 있는 증인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하고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했어요. 재미있죠.

 

진행자: 마음 아픈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럼 다시 화제를 동문회로 돌리겠습니다. 동문회를 우리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김성순: 제가 알기로는 송석환 전 동문회장님이 동문회를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최고 많이 모일 때는 20명 이상씩 정기적으로 모여서 모임을 갖고 있어요.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데, 4월에는 수학여행으로 모임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모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김성순: 물론 동문들 친목도모가 가장 궁극적 목적입니다. 음! 그리고 우리 학교를 사랑하고 선생님들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학교 발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 실천하는 일도 하고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야학을 잊지 않기 위함인 것 같아요.

 

진행자: 동문회 총무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점이 있다면?

김성순: 딱히 특별한 것은 없어요! 다만 선생님들이 교사 연수 가실 때 총무 자격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좋습니다.

 

진행자: 항상, 맛난 음식을 싸 오셔서 감사한 마음이지만, 교사로서는 죄송스러운데....

김성순: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그런데 지난 연수에서 교감선생님이 음식을 싸가지 못하게 하셔서 너무 속상합니다. 제가 교사 연수에 찾아가는 의미가 없어요. 교감 선생님은 저를 생각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알겠지만.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야학을 졸업하면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후원계좌가 있어요. 그걸 제가 동참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도 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 교사연수 가실 때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진행자: 하하! 교감선생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께요. 저는 개인적으로 총무님의 맛난 음식을 더 맛보고 싶습니다. 하하. 동문회 활동과 관련하여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성순: 우리 학교 학생들이 졸업하고 동문회 참여를 많이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수학여행을 1박 2일로 가면 좋겠어요. 제가 현재 방신통신대학을 다니고 있어요. 한마음 야학 졸업하고 2020년도 2학기에 바로 입학했죠. 벌써 졸업반이에요.

 

진행자: 정말 대단하세요. 전공은요?

김성순: 청소년 교육을 전공해서 청소년 지도사와 상담사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어요. 그리고 복수전공으로 사회복지학과 공부도 병행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답니다.

 

진행자: 네! 총무님의 열정을 응원합니다. 아! 다시 돌아가서, 수학여행을 1박 2일로요?

김성순: 예! 그러니깐 다니는 대학에서 1박 2일로 평창에 MT를 갔었어요. 장기 자랑도 하고 저녁에 교수님들이랑 뒤풀이도 하고. 정말 기억에 남는 일이었어요. 우리 야학에서도 1박 2일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렵겠죠.

 

진행자: 하하!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추진해 보죠. 혹시 동문회 운영과 관련하여 학교에 바라는 점이 있으실까요?

김성순: 물가 상승에 따라 우리 동문회가 모임 회비를 2만원에서 3만원으로 몇 년 전 올렸어요. 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잖아요. 물론 모임 회비에 상관없이 나오실 분은 나오시겠지만, 부담이 되는 분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염치없지만, 학교에서의 지원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녁 먹고 술 마시는 형태의 모임도 좋지만, 좀 더 다양한 형식의 행사들이 마련된다면 동문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요. 어쨌든 모임은 재미있어야 하잖아요. 모임을 노래방에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어쨌든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좀 뻘쭘한 것 같아요.

 

진행자: 그러네요. 동문회 활성화를 위해 우리 함께 고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아요(실제로 카페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김성순: 제 MBTI가 ISFP에요. 내향형(I), 감각형(S). 감정적(F). 인식형(P)이래요. 그래서 그런지, 남 앞에 나서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그런데 제 성격이 야학 다니고 총무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야학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면서 자존감도 많이 높아졌어요. 우리 야학은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곳이잖아요. 항상 응원해주시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곳이잖아요. 제가 원래 ‘틱’이 있었다고 해요. 딸이 알려 주었어요. 딸아이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 자리처럼 긴장된 상황에서는 항상 틱 증상을 보였다고 해요. 물론 저는 제가 그런지 잘 몰랐지요. 그런데 제가 우리 야학에서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틱 증상이 사라졌다고 딸이 말하더라고요. 요즘은, 과거에는 데면데면했던 친척들에게도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어요.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결국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세월이 흘러가면서 욕망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살고 있어요. 모서리도 많이 부딪치면 둥글어지잖아요. 냉장고도 조금은 비어 있어야 새로 장만한 음식을 넣을 수 있잖아요. 마음을 조금씩 비우면서 살려고요. 제 삶이 너무 힘들어서 세상을 원망하면서 살았었는데.... 이제는 많이 편해졌어요. 애벌레에서 나비가 허물을 벗고 나오듯이,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