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주말에 시간 떼우기로 우치다 타츠루의 책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오늘 집은 책은 이름도 거창하게 '거리의 현대사상, 부제 우리 주위에 만연한 허위 상식 뒤집기'이다. 자못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란 이렇다. 백발이 성성한 중년의 아재가 사자 수염을 기른 채 금색 레이밴, 청바지, 가죽재킷을 입고 할리 데이비슨 위에 앉아 거친 절벽의 너머 수평선의 오메가를 바라보면서 갈색 맥주병에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터프하면서도 끝내 진솔한 그 느낌이 좋다.
책의 구성은 총 3장이다.
1장: 문화자본주의의 시대
2장: 이겼느니 졌느니 떠들지 마라
3장: 거리의 상식
3장 거리의 상식은 흥미로운 토픽이 꽤 있다. 그중 꼽자면 '타자로서 배우자에 대해',와 '상상력과 윤리에 대해'가 재밌다. 생각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결혼은 쾌락은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 약속하는 것은 끝없는 불쾌함이다. 하지만 결혼은 불쾌함을 극복해낸 인간에게 쾌락이 아니라 어떤 성취를 약속한다. 그 성취는 재생산이 아니라 불쾌한 이웃, 다시 말해 타자와 공행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
아래의 글은 역지사지을 요구하는 세상에 대해 필자에 대한 답이다. 진정으로 상상을 발휘해야 하는 대상은 상대가 아닌 우리 스스로여야 됨을 이야기 하는 구절은 꽤 흥미롭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할 윤리적 규범은 어떤 면에서는 간단하다. 바로 사회 전원이 '나 같은 인간'이 되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정치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 대부분은 사회 전체가 '나 같은 사람'으로만 가득 찼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를 상상한 적 없다. 내가 나의 '동료'로 허용할 수 있는 이는 '우치다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을 대로 해'라고 말해주는 사람, 사회에 갖가지 트러블이 생겼을 때 '나쁜 건 누구야?'라는 남 탓하는 설문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뭐, 이것저것 곤란한 일은 있지만 모두 함께 조금씩 트러블의 책임을 집시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나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는 나를 구석구석까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 언동에 공감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편이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타츠루 식의 공생이란 재미있다. 그것은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삶을 살 뿐이고 서로에 대한 긍정을 기반으로 한다. 자주 써먹는 도덕경 첫구절이 생각난다. '道可道 非常道' 단언할 수 없는 진리가 없기에 모든 것이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선언이 다시 떠오른다. 몇 가지 정리 안된 이야기들이 있으나 그것은 '지금은 질문을 살아가십시오. 언젠가는 그 답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정도로 마무리해야겠다.
역시나 주말에 시간 떼우기로 우치다 타츠루의 책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오늘 집은 책은 이름도 거창하게 '거리의 현대사상, 부제 우리 주위에 만연한 허위 상식 뒤집기'이다. 자못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란 이렇다. 백발이 성성한 중년의 아재가 사자 수염을 기른 채 금색 레이밴, 청바지, 가죽재킷을 입고 할리 데이비슨 위에 앉아 거친 절벽의 너머 수평선의 오메가를 바라보면서 갈색 맥주병에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터프하면서도 끝내 진솔한 그 느낌이 좋다.
책의 구성은 총 3장이다.
1장: 문화자본주의의 시대
2장: 이겼느니 졌느니 떠들지 마라
3장: 거리의 상식
3장 거리의 상식은 흥미로운 토픽이 꽤 있다. 그중 꼽자면 '타자로서 배우자에 대해',와 '상상력과 윤리에 대해'가 재밌다. 생각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결혼은 쾌락은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 약속하는 것은 끝없는 불쾌함이다. 하지만 결혼은 불쾌함을 극복해낸 인간에게 쾌락이 아니라 어떤 성취를 약속한다. 그 성취는 재생산이 아니라 불쾌한 이웃, 다시 말해 타자와 공행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일 것이다.'
아래의 글은 역지사지을 요구하는 세상에 대해 필자에 대한 답이다. 진정으로 상상을 발휘해야 하는 대상은 상대가 아닌 우리 스스로여야 됨을 이야기 하는 구절은 꽤 흥미롭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할 윤리적 규범은 어떤 면에서는 간단하다. 바로 사회 전원이 '나 같은 인간'이 되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의 입장이 되어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정치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 대부분은 사회 전체가 '나 같은 사람'으로만 가득 찼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를 상상한 적 없다. 내가 나의 '동료'로 허용할 수 있는 이는 '우치다가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을 대로 해'라고 말해주는 사람, 사회에 갖가지 트러블이 생겼을 때 '나쁜 건 누구야?'라는 남 탓하는 설문 형식에 집착하지 않고 '뭐, 이것저것 곤란한 일은 있지만 모두 함께 조금씩 트러블의 책임을 집시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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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나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는 나를 구석구석까지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내 언동에 공감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의 편이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타츠루 식의 공생이란 재미있다. 그것은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삶을 살 뿐이고 서로에 대한 긍정을 기반으로 한다. 자주 써먹는 도덕경 첫구절이 생각난다. '道可道 非常道' 단언할 수 없는 진리가 없기에 모든 것이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선언이 다시 떠오른다. 몇 가지 정리 안된 이야기들이 있으나 그것은 '지금은 질문을 살아가십시오. 언젠가는 그 답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정도로 마무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