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나눔 공간


카페

한마음야학 관리자
2019-07-17
조회수 174

테이블을 때리는 강한 진동. 몽상을 깨운다. ‘주문한 차가 다 되었으니 가져가라고 카페 진동벨은 온 몸을 떨고 있다. 진동벨을 움켜쥐고 카운터로 향한다. 카운터에는 수국이 그려진 아담한 크기의 사기 찻잔과 주전자가 담긴 쟁반이 놓여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쟁반을 살며시 앞으로 내민다. 자리로 돌아와 주전자를 기울인다. 찻잔이 채워진다. 향기로운 민트 향이 은은히 솟아오른다. 호호 불며 한 모금. 머리가 환해지는 찰나의 행복감이 뇌 속 중심으로부터 방사상으로 퍼진다. 창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눈에 익숙한 도시. 맑은 날, 남산 타워에서 서울시를 내려다보는 느낌. 고층 빌딩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일정한 속도로 미끄러진다.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위 전철은 강물에 반사된 햇빛을 아른거린다.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카페인 듯.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본다. 창을 바라보며 배열된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다. 카페 홀 4인용 테이블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한 쌍의 커플이 서로의 눈을 다정히 응시한다. 익숙하다. 언젠가 와 본적이 있는 카페다. 그러나 이 공간의 기억은 흐릿하다. 집 근처일까? 직장 근처일까? 주름진 손이 눈에 들어온다. 많이 늙었다. 깜박깜박하는 것이 당연한 나이. 시간의 기억도 흐릿하다. 오늘은 며칠이고 지금은 몇 시인가. 핸드폰을 찾는다. 테이블 위에는 없다. 바지 뒷주머니에는? 없다. 지갑은 오른쪽, 핸드폰은 왼쪽 뒷주머니에 습관적으로 집어넣었었다. 핸드폰도 지갑도 만져지지 않는다. 셔츠 주머니에도? 없다. 아니. 뭔가가 있다. 꺼내어 본다. 만 원짜리 지폐 몇 장.

나는 왜 한 낮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지. 만날 약속이 있었던 게야. 누구를?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더 머금는다. 반쯤 비워진 찻잔을 채운다. 어쩌면 이렇게도 기억이 없는가? 누군가를 만나기로 약속된 것은 사실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갈까? 집은 어디지? 다시 창밖을 내다본다. 익숙한 아파트들이 줄지어 산개한다. 모두가 내 집 같고 모두가 내 집 아닌 것 같다. 우선 나갈 볼까? 두렵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전화기를 빌려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포기한다. 전화번호를 알 수 없다.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가까운 사람들 전화번호 열 개쯤은 외우고 다녔는데. 핸드폰의 번호저장 기능이 망각을 앞당겼는지 모른다. 혹시 종업원은 나에 대해 알고 있을까? 카운터로 돌아본다. 종업원은 꼿꼿한 자세로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다. 알바하는 학생일까? 무어라 말을 걸지? ‘학생, 내를 아나?’ ‘내 집이 어딘지 혹시 아나?’ 미친 늙은이. 상대도 안 해 줄 꺼다. 기억이 갑자기 사라져 도와달라고 사정한다면? 관둔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차를 넘길 때 한 마디 인사쯤은 건넸겠지. 종업원은골똘히 책에만 집중한다. 방해하고 싶지 않다.

지갑은 어디에 두었을까? 지갑에는 주민등록증이 있다. 주민등록증에는 주소가 있다. 주소만 있다면, 경찰은 나를 집으로 안내할 것이다. 집은 기억을 돌려줄 것이다. 아내는 기억을 돌려줄 것이다. 아이들은 기억을 돌려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있었나? 딸이었나? 아들이었나? 몇 살? 손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주름진 손. 내 나이는 얼마쯤 되었을까? 지갑을 찾아야 한다. 테이블 밑을 살펴본다. 없다. 주변을 다시 둘러본다. 연인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눈을 맞추고 있다. 창가에 앉은 사람들은 무심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깨닫는다. 카페에는 줄곧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바그다드 카페 OST’. 황량한 사막, 낡은 카페 하나, 포옹하는 두 여인. 영화의 장면들이 스친다. I am calling you. Can’t you hear me. I am calling you. 누구를 저토록 애절히 찾는 것일까? 나는 누구를 찾는가? , 자신.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거울. 거울이 필요하다. 화장실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은 나를 알려줄 것이다. 출입문 옆 천장에 화장실 방향을 알리는 팻말이 매달려 있다.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이 있던 왼쪽 뒷주머니와 지갑이 있던 오른쪽 뒷주머니를 확인해 본다. 부질없다남자 화장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그 흔한 거울 하나가 이 카페에는 달려있지 않다. 혹시 여자 화장실에는? 차마 여자 화장실 문을 열어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포기하고 돌아와 앉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유로워지는 것이다. 세상사, 더 이상 신비할 것도, 급할 것도 없다. 시간에 몸을 맡길 줄 안다는 게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시간에게 의지하는 게다.

풍경소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출입문에 달린 종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다. 말쑥한 차림의 사람이 출입문을 등지고 서서 카페 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 시선이 나에게서 멈춘다. 눈빛이 맑다. 미소가 아름답다. 다가온다. ! 내가 아는 사람이다. 누구지? 기억은 흐릿하나 분명 나는 상대를 알고 있다. 상대도 나를 알고 있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인게다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두 손을 마주하고 가볍게 악수를 나눈다. 명료해 진다. 그렇다!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고마웠다고 말했어야 했다.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다. 당신은 나를 숨 쉬게 하는 존재였다고 말했어야 했다. 함께 카페를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