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국민들은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국민이 주인 되는 한반도를 꿈꾸었으나 삼김(三金)은 국민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노태우 정권이 태동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존재와의 첫 키스의 강렬함은 국민들로 하여금 주인 된 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깨닫게 하였고 사회 곳곳에서 스스로의 목소리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여름, 서울대생 임수경은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방북하여 평양의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는다. 세상은 그렇게 요동이고 있었으나 남산 끝자락의 한 입시 종합학원 건물 옥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하였다.
* * *
‘재수야!’
‘응!’
‘영화 보러 갈래?’
‘언제!’
‘지금’
‘니, 미쳤나! 지금 어떻게 가나?’
‘다 방법이 있어. 갈래? 신호하고 민기도 같이 가기로 했어. 콜?’
누구나 그렇듯 여름 햇살은 사람을 나근하게 하고 일탈을 꿈꾸게 한다. 대학에 떨어지고 입시 학원에 첫 발을 내디딘 2월만 해도 재수의 마음은 오직 공부에만 있었다. 2월‧3월‧4월‧5월, 재수의 몸은 재수의 마음이 내리는 명령에 순종했다. 봄바람에 팔랑이며 귓가를 스치던 벚꽃 잎도,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의 초대로 처음 경험했던 대학 축제의 열기도, 재수의 굳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계추와 같은 일상의 반복이, 기지개조차 제대로 켤 수 없을 만큼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입시학원 강의실의 불편함이, 소리 없이 뿜어져 공기 중에 분사되는 젊은 청춘들의 페르몬이 재수의 육체를 지치게 했다. 그리고 재수의 육체는 재수의 마음에게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함께 도시락을 까먹고 옥상에서 담배를 나눠 피며 접하게 된 태식이의 은밀한 제안은 그렇게 재수의 일탈을 현실화하였다.
학원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다. 다만 각 층을 지키고 있는 저승사자(관리자)들이 학생들의 출석을 확인하고, 층간 이동을 제한하며, 신체를 구속하고, 겁박하고, 회유한다. 재수가 몸담고 있는 반은 건물 4층에 있었다. 재수와 같은 반 학생들이 아침에 출원하여 4층에 있는 강의실에 입실하고 출석이 확인되면 저승사자는 3층과 이어지는 계단에 책상을 놓고 상주하며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딱 두 번, 제 2외국어 수업이 있는 날만은 예외다. 각 반마다 학생들이 선택한 제2외국어의 종류가 제각각이라 수업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이합집산이 불가피했다. 외국어 수업은 1층에 마련된 강당 형태의 좀 더 큰 강의실 몇 군데에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제2외국어 수업이 있는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에 각자 자신이 청강할 강의실로 갈 수 있는 제한적 이동의 자유가 주어졌다. 태식이는 이 틈을 노린 것이다. 물론 1층에 있는 건물의 정식 출입문을 통해서는 외부로 몰래 나갈 수 없다. 그러나 1층 복도 끝에 테라스 형태의 담배 피는 곳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2층 테라스로 올라가면 테라스의 높이가 건물 담벽의 높이와 거의 비슷하여 약간의 용기와 균형 감각을 발휘하면 건물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 * *
‘우~~와! 끝내주지 않냐? 그 여주인공, 정말 제대로란 말이지. 재미있었지?’
태식이는 영화를 보고 나오며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뭐가 재밌냐! 왕 유치더라.’
‘그래! 스토리가 영 황당무계하고, 꽝이야!’
태식이는 별난 데가 있는 놈이다. 녀석의 레이더는 항상 여학생들에게 맞춰져 있었고, 음탕한 이야기로 우리를 낄낄대게 하는 놈이다. 집이 부유한지 항상 넉넉한 지폐를 소유하고 다녔고 오늘 영화비도 모두 태식이가 부담했다. 녀석은 리더 역할을 자처했고, 다음 행선지를 제안했다.
‘이제 뭐할까?’
‘글쎄! 뭐하지?’
‘맥주나 한 잔 하러 갈래?’ 태식이의 제안은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그러나 학원간 놈들이 술 냄새 풍기며 집에 들어갔다가는 이후 맞이하게 될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 저절로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야! 죽을 일 있냐. 종로서적이나 가자!’
‘미친 놈! 뭔 얼어 죽을 놈의 종로서적이야! 책 지겹지도 않냐?’ 자유도 자유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법이다. 태식, 재수, 신호, 민기는 그들이 겨냥했던 첫 번째 목표 달성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설계는 전혀 없었다. 마치 관아를 급습하여 군수의 목을 날려버리고 곳간에 쌓여있는 쌀섬을 확보하기는 하였으나. 그 다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저 동학농민 혁명군처럼.
‘그럼 내일 보자’
‘잘 가~~~’ 그들은 헤어졌다.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들었다. 태식이의 제안이 구미에 당겼으나 나머지 세 놈들이 그를 따라 가기에는 아직 순둥이에 용기가 부족했다.
* * *
재수는 자신이 생각했던 데로 종로서적으로 향했다. 종로3가 전철역에서 내려 종로서적 방향으로 계단을 오른다. 전철역 출구에는 전경 둘이 양 옆에 서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재수는 뒷주머니에 고등학교 학생증을 지니고 다녔다. 시내에는 항상 전경들이 깔려 있었고, 가방을 맨 젊은 청년들은 어김없이 불시 검문을 받아 가방 속을 까뒤집혀야만 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임을 증명하는 학생증을 제시하면 무사 통과였다. 학생증 아래 적혀있는 날짜까지는 꼼꼼히 보질 않으니 문제는 없었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한가했다.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수학공식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풀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니 왠지 뿌듯함까지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향한다.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전시되어 있는 책들의 제목을 살펴본다. ‘비폭력이란 무엇인가!’ 책 제목이 눈에 띈다. 책을 집어 들어 살펴본다. 물레를 앞에 두고, 옷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긴 천을 어깨위로 휘두른 간디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톨스토이’. 러시아 작가.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저술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왠지 ‘~~ 세계문학선집’하면 거부감이 들어 한 번도 그의 책을 접한 적은 없다. 시험에도 안 나온다. ‘마틴 루터 킹’. 사진을 보니 알 것 같다.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몇 장을 뒤적이며 무슨 내용인지 살펴본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훌륭한 사람들 같다. 자리를 옮긴다. 십여 권의 초록색 표지 책들이 같은 높이로 진열되어 있다. 다가가 본다. 김동인 전집이다.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등의 작품으로 시험문제에 꼭 나오는 인물이니 알아두어야 한다. 몇 권의 단편집 넘어 ‘젊은 그들’이란 제목의 장편소설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그들!’ 왠지 제목이 멋지다! 오케이! 오늘은 이 책으로 결정했다. 서적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잘 지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2시간 이상을 이 서적에서 보내고 있었다.
* * *
책값을 지불하고 1층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밖이 심상치 않다. 최루탄 냄새가 이미 서적 내부로 스며들어오고 있었고 셔터문은 반쯤 내려져 있었다. 야단이다. 지금 나가 버스를 타야 집에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다. 최루탄 정도야 고등학교 내내 맡아 와서 만성이 되었다. 이쯤이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수는 고개를 숙여 반쯤 내려온 셔터문 밑을 통해 거리로 나왔다.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차들은 반쯤 멈춰 있고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복면을 쓴 채 종로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어김없이 그 뒤에는 반짝이는 헬멧과 몽둥이로 무장한 백골단들이 뒤 쫒고 있었다. 재수는 우선 버스를 타야한다는 생각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삼십 미터쯤 뛰었을 무렵, 재수의 발목을 저지하는 강한 물리적 힘이 느껴졌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던 재수의 육체는 관성이라는 물리법칙에 순응하여 공중으로 떠올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시공간과 인간이 저마다 느끼는 시공간에는 분명 매우기 힘든 커다란 괴리가 있다. 재수의 몸은 단 1초도 되지 않아 종로 바닥을 뒹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중으로 떠오른 순간부터 신체 일부가 땅바닥과 마주할 때까지 재수가 경험한 시간은 꽤나 긴 그 무엇이었다. ‘시계가 손목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까’, ‘가방은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을까’, ‘몸에 난 상처에 대해 다그쳐 묻는 엄마에게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등, 재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난 간 질문들은 반년동안 학원에서 가졌던 질문들보다 많은 것이었다.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고 멋들어지게 내동댕이처진 재수의 육체는 그 이후로 재수의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완력이 재수의 책가방 손잡이와 뒷목덜미를 제압하였고 재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재수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두 손을 목 뒤로 넘겨 움켜잡은 손을 뿌리치려 해 보았으나 결과적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곧바로 묵직한 워커(군화)가 재수의 옆구리와 등을 두 차례 가격했다. 순간 온 몸의 힘이 쭉 빠졌고, 재수는 강력한 완력에 온 몸을 맡긴 채 끌려가고 있었다.
* * *
전경버스 내부는 이미 잡혀 온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재수는 어떻게든 빈자리에 끼여 앉았고 버스 문은 닫혔다. 전경 두 명이 버스 복도 앞부분과 뒷부분에 위치했다. 그들은 좌석 손잡이며 창틀을 곤봉으로 수차례 가격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만들어 냈고, 조용히 외쳤다. ‘고개 숙이십쇼. 대가리 깨집니다! 머리 뒤로 깍지 끼고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 들지 마십시오. 대가리 깨집니다.’ 재수의 머리 위로는 곤봉이 반원을 그리며 휘돌았고, 고개를 잘못 들었다가는 이만수 선수 방망이에 딱 걸린 야구공 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버스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차는 출발하였다. ‘눈깔 돌아가는 소리 들립니다. 조용히 합니다!’ 전경 한 놈은 수시로 이런저런 겁박성 명령어를 내뱄었고, 주위를 살피려 좌우로 부산히 움직이던 눈동자들은 다시금 얼어붙었다. 자석에 끌리듯 사람들의 머리도 함께 무릎 쪽으로 움츠러들었다.
어느덧 주위는 어두워졌다. 전경버스가 멈춰 서고 버스 앞문이 열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바깥쪽 좌석에 착석한 시민들부터 하차합니다. 앞 사람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고개는 들지 않습니다.’ 목동 한 사람이 어떻게 수십에서 수백 마리의 양을 돌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양 무리 중 우두머리 한 마리만 조정하면 된다. 나머지 양들은 우두머리의 뒤를 따르게 되어 있다. 목동이 양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양들이 순해서가 아니다. 양들이 멍청해서, 자유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 가능한 것이다. 기차놀이를 하듯 앞사람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버스 밖으로 나온다. 재수도 가방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뒤따른다.
* * *
앞사람을 따라 들어온 건물 내부는 야단법석이다. 재수와 함께 끌려 온 사람들 이외에도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철창 안에서,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건물 내부 구석에 처박혀져 웅성거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형사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 앉아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재수와 함께 온 사람들도 기를 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래요?’ ‘몰라요. 아시는 분 있으세요.’ ‘뭐, 어디 경찰서겠지요.’ ‘나는 그냥 서 있다가 잡혀 왔어요. 재수가 없으려니깐.’ ‘뭔 일이야 있겠어요. 좀 있다 나가겠죠.’ ‘재수 없으면 징역 산다던데요.’ ‘설마 그러겠어요.’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잠시, 경찰 정복을 차려 입은 중년의 남자와 그를 보좌하는 것 같은 형사 둘이 사람들 앞에 섰다.
‘자! 정숙합니다.’ 오른쪽 형사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한다.
‘여러 분은 집시와 시위에 관한 법률 제6조를 위반하여 이곳 성북경찰서에 이송되어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간단한 신분조회가 있을 것이고, 위법행위에 대한 조사가 있을 것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정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말했다. 왜 궁금한 것이 없겠는가?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가지고 있는 의문을 발설하지 못한다. ‘자 시작하지!’ 정복을 입은 남성이 왼쪽 형사에게 명령했고, 형사는 한 걸을 앞으로 나오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 대학생과 일반 시민을 분류하겠습니다. 대학생은 저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그리고 일반 시민은 왼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좌우로 순식간에 움직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위치를 찾아간다. 텅 빈 중앙에 재수 혼자만 남아있다.
‘야! 넌 뭐야. 우리말 몰라!’ 전경 한 명이 곤봉으로 재수를 가리키며 호통이다.
‘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국민들은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국민이 주인 되는 한반도를 꿈꾸었으나 삼김(三金)은 국민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노태우 정권이 태동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존재와의 첫 키스의 강렬함은 국민들로 하여금 주인 된 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깨닫게 하였고 사회 곳곳에서 스스로의 목소리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9년 여름, 서울대생 임수경은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방북하여 평양의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는다. 세상은 그렇게 요동이고 있었으나 남산 끝자락의 한 입시 종합학원 건물 옥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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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야!’
‘응!’
‘영화 보러 갈래?’
‘언제!’
‘지금’
‘니, 미쳤나! 지금 어떻게 가나?’
‘다 방법이 있어. 갈래? 신호하고 민기도 같이 가기로 했어. 콜?’
누구나 그렇듯 여름 햇살은 사람을 나근하게 하고 일탈을 꿈꾸게 한다. 대학에 떨어지고 입시 학원에 첫 발을 내디딘 2월만 해도 재수의 마음은 오직 공부에만 있었다. 2월‧3월‧4월‧5월, 재수의 몸은 재수의 마음이 내리는 명령에 순종했다. 봄바람에 팔랑이며 귓가를 스치던 벚꽃 잎도,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의 초대로 처음 경험했던 대학 축제의 열기도, 재수의 굳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시계추와 같은 일상의 반복이, 기지개조차 제대로 켤 수 없을 만큼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입시학원 강의실의 불편함이, 소리 없이 뿜어져 공기 중에 분사되는 젊은 청춘들의 페르몬이 재수의 육체를 지치게 했다. 그리고 재수의 육체는 재수의 마음에게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함께 도시락을 까먹고 옥상에서 담배를 나눠 피며 접하게 된 태식이의 은밀한 제안은 그렇게 재수의 일탈을 현실화하였다.
학원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다. 다만 각 층을 지키고 있는 저승사자(관리자)들이 학생들의 출석을 확인하고, 층간 이동을 제한하며, 신체를 구속하고, 겁박하고, 회유한다. 재수가 몸담고 있는 반은 건물 4층에 있었다. 재수와 같은 반 학생들이 아침에 출원하여 4층에 있는 강의실에 입실하고 출석이 확인되면 저승사자는 3층과 이어지는 계단에 책상을 놓고 상주하며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딱 두 번, 제 2외국어 수업이 있는 날만은 예외다. 각 반마다 학생들이 선택한 제2외국어의 종류가 제각각이라 수업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이합집산이 불가피했다. 외국어 수업은 1층에 마련된 강당 형태의 좀 더 큰 강의실 몇 군데에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제2외국어 수업이 있는 수요일과 금요일 오후에 각자 자신이 청강할 강의실로 갈 수 있는 제한적 이동의 자유가 주어졌다. 태식이는 이 틈을 노린 것이다. 물론 1층에 있는 건물의 정식 출입문을 통해서는 외부로 몰래 나갈 수 없다. 그러나 1층 복도 끝에 테라스 형태의 담배 피는 곳이 있었고, 계단을 따라 2층 테라스로 올라가면 테라스의 높이가 건물 담벽의 높이와 거의 비슷하여 약간의 용기와 균형 감각을 발휘하면 건물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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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끝내주지 않냐? 그 여주인공, 정말 제대로란 말이지. 재미있었지?’
태식이는 영화를 보고 나오며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뭐가 재밌냐! 왕 유치더라.’
‘그래! 스토리가 영 황당무계하고, 꽝이야!’
태식이는 별난 데가 있는 놈이다. 녀석의 레이더는 항상 여학생들에게 맞춰져 있었고, 음탕한 이야기로 우리를 낄낄대게 하는 놈이다. 집이 부유한지 항상 넉넉한 지폐를 소유하고 다녔고 오늘 영화비도 모두 태식이가 부담했다. 녀석은 리더 역할을 자처했고, 다음 행선지를 제안했다.
‘이제 뭐할까?’
‘글쎄! 뭐하지?’
‘맥주나 한 잔 하러 갈래?’ 태식이의 제안은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그러나 학원간 놈들이 술 냄새 풍기며 집에 들어갔다가는 이후 맞이하게 될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 저절로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야! 죽을 일 있냐. 종로서적이나 가자!’
‘미친 놈! 뭔 얼어 죽을 놈의 종로서적이야! 책 지겹지도 않냐?’ 자유도 자유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법이다. 태식, 재수, 신호, 민기는 그들이 겨냥했던 첫 번째 목표 달성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설계는 전혀 없었다. 마치 관아를 급습하여 군수의 목을 날려버리고 곳간에 쌓여있는 쌀섬을 확보하기는 하였으나. 그 다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저 동학농민 혁명군처럼.
‘그럼 내일 보자’
‘잘 가~~~’ 그들은 헤어졌다.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들었다. 태식이의 제안이 구미에 당겼으나 나머지 세 놈들이 그를 따라 가기에는 아직 순둥이에 용기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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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는 자신이 생각했던 데로 종로서적으로 향했다. 종로3가 전철역에서 내려 종로서적 방향으로 계단을 오른다. 전철역 출구에는 전경 둘이 양 옆에 서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재수는 뒷주머니에 고등학교 학생증을 지니고 다녔다. 시내에는 항상 전경들이 깔려 있었고, 가방을 맨 젊은 청년들은 어김없이 불시 검문을 받아 가방 속을 까뒤집혀야만 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임을 증명하는 학생증을 제시하면 무사 통과였다. 학생증 아래 적혀있는 날짜까지는 꼼꼼히 보질 않으니 문제는 없었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한가했다.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수학공식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풀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니 왠지 뿌듯함까지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2층을 지나 3층으로 향한다.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전시되어 있는 책들의 제목을 살펴본다. ‘비폭력이란 무엇인가!’ 책 제목이 눈에 띈다. 책을 집어 들어 살펴본다. 물레를 앞에 두고, 옷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긴 천을 어깨위로 휘두른 간디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톨스토이’. 러시아 작가.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저술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왠지 ‘~~ 세계문학선집’하면 거부감이 들어 한 번도 그의 책을 접한 적은 없다. 시험에도 안 나온다. ‘마틴 루터 킹’. 사진을 보니 알 것 같다.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문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몇 장을 뒤적이며 무슨 내용인지 살펴본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훌륭한 사람들 같다. 자리를 옮긴다. 십여 권의 초록색 표지 책들이 같은 높이로 진열되어 있다. 다가가 본다. 김동인 전집이다.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등의 작품으로 시험문제에 꼭 나오는 인물이니 알아두어야 한다. 몇 권의 단편집 넘어 ‘젊은 그들’이란 제목의 장편소설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그들!’ 왠지 제목이 멋지다! 오케이! 오늘은 이 책으로 결정했다. 서적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잘 지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2시간 이상을 이 서적에서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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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을 지불하고 1층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밖이 심상치 않다. 최루탄 냄새가 이미 서적 내부로 스며들어오고 있었고 셔터문은 반쯤 내려져 있었다. 야단이다. 지금 나가 버스를 타야 집에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다. 최루탄 정도야 고등학교 내내 맡아 와서 만성이 되었다. 이쯤이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수는 고개를 숙여 반쯤 내려온 셔터문 밑을 통해 거리로 나왔다.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차들은 반쯤 멈춰 있고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복면을 쓴 채 종로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어김없이 그 뒤에는 반짝이는 헬멧과 몽둥이로 무장한 백골단들이 뒤 쫒고 있었다. 재수는 우선 버스를 타야한다는 생각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삼십 미터쯤 뛰었을 무렵, 재수의 발목을 저지하는 강한 물리적 힘이 느껴졌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던 재수의 육체는 관성이라는 물리법칙에 순응하여 공중으로 떠올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시공간과 인간이 저마다 느끼는 시공간에는 분명 매우기 힘든 커다란 괴리가 있다. 재수의 몸은 단 1초도 되지 않아 종로 바닥을 뒹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중으로 떠오른 순간부터 신체 일부가 땅바닥과 마주할 때까지 재수가 경험한 시간은 꽤나 긴 그 무엇이었다. ‘시계가 손목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까’, ‘가방은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을까’, ‘몸에 난 상처에 대해 다그쳐 묻는 엄마에게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할까’ 등, 재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난 간 질문들은 반년동안 학원에서 가졌던 질문들보다 많은 것이었다.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고 멋들어지게 내동댕이처진 재수의 육체는 그 이후로 재수의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완력이 재수의 책가방 손잡이와 뒷목덜미를 제압하였고 재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재수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두 손을 목 뒤로 넘겨 움켜잡은 손을 뿌리치려 해 보았으나 결과적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곧바로 묵직한 워커(군화)가 재수의 옆구리와 등을 두 차례 가격했다. 순간 온 몸의 힘이 쭉 빠졌고, 재수는 강력한 완력에 온 몸을 맡긴 채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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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버스 내부는 이미 잡혀 온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재수는 어떻게든 빈자리에 끼여 앉았고 버스 문은 닫혔다. 전경 두 명이 버스 복도 앞부분과 뒷부분에 위치했다. 그들은 좌석 손잡이며 창틀을 곤봉으로 수차례 가격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만들어 냈고, 조용히 외쳤다. ‘고개 숙이십쇼. 대가리 깨집니다! 머리 뒤로 깍지 끼고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 들지 마십시오. 대가리 깨집니다.’ 재수의 머리 위로는 곤봉이 반원을 그리며 휘돌았고, 고개를 잘못 들었다가는 이만수 선수 방망이에 딱 걸린 야구공 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버스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차는 출발하였다. ‘눈깔 돌아가는 소리 들립니다. 조용히 합니다!’ 전경 한 놈은 수시로 이런저런 겁박성 명령어를 내뱄었고, 주위를 살피려 좌우로 부산히 움직이던 눈동자들은 다시금 얼어붙었다. 자석에 끌리듯 사람들의 머리도 함께 무릎 쪽으로 움츠러들었다.
어느덧 주위는 어두워졌다. 전경버스가 멈춰 서고 버스 앞문이 열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바깥쪽 좌석에 착석한 시민들부터 하차합니다. 앞 사람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고개는 들지 않습니다.’ 목동 한 사람이 어떻게 수십에서 수백 마리의 양을 돌볼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양 무리 중 우두머리 한 마리만 조정하면 된다. 나머지 양들은 우두머리의 뒤를 따르게 되어 있다. 목동이 양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양들이 순해서가 아니다. 양들이 멍청해서, 자유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 가능한 것이다. 기차놀이를 하듯 앞사람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사람들이 줄지어 버스 밖으로 나온다. 재수도 가방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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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사람을 따라 들어온 건물 내부는 야단법석이다. 재수와 함께 끌려 온 사람들 이외에도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철창 안에서,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건물 내부 구석에 처박혀져 웅성거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형사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 앉아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재수와 함께 온 사람들도 기를 펴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래요?’ ‘몰라요. 아시는 분 있으세요.’ ‘뭐, 어디 경찰서겠지요.’ ‘나는 그냥 서 있다가 잡혀 왔어요. 재수가 없으려니깐.’ ‘뭔 일이야 있겠어요. 좀 있다 나가겠죠.’ ‘재수 없으면 징역 산다던데요.’ ‘설마 그러겠어요.’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잠시, 경찰 정복을 차려 입은 중년의 남자와 그를 보좌하는 것 같은 형사 둘이 사람들 앞에 섰다.
‘자! 정숙합니다.’ 오른쪽 형사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좌중을 압도한다.
‘여러 분은 집시와 시위에 관한 법률 제6조를 위반하여 이곳 성북경찰서에 이송되어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간단한 신분조회가 있을 것이고, 위법행위에 대한 조사가 있을 것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정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말했다. 왜 궁금한 것이 없겠는가?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가지고 있는 의문을 발설하지 못한다. ‘자 시작하지!’ 정복을 입은 남성이 왼쪽 형사에게 명령했고, 형사는 한 걸을 앞으로 나오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 대학생과 일반 시민을 분류하겠습니다. 대학생은 저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그리고 일반 시민은 왼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좌우로 순식간에 움직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위치를 찾아간다. 텅 빈 중앙에 재수 혼자만 남아있다.
‘야! 넌 뭐야. 우리말 몰라!’ 전경 한 명이 곤봉으로 재수를 가리키며 호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