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나눔 공간


야학 가는 길

한마음야학 관리자
2018-03-29
조회수 157

1997년 겨울, 서울 아산중앙병원 연구동을 나선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성내천을 가로지르는 육교를 지난다. 방금 피시알(polymerase chain reaction)을 돌리고 나왔으니 내일 전기영동을 걸면 오전 중에 결과를 볼 수 있다. 연구라는 것이 겉보기에는 거창하고 뭔가 있어 보였는데 막상 실무를 접해보니 어차피 반복되는 일상이다. 내일 결과가 좋지 않으면 동일한 샘플을 대상으로 동일한 일을 반복하고, 결과가 좋으면 다른 샘플로 역시 동일한 일을 반복한다.

 

성내역은 퇴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그득하다. 초록색 전철이 도착하고 문을 열어 한아름의 사람들을 토해낸다. 다시 그만큼의 사람들을 집어삼키고는 문을 닫는다. 출발. 네 정거장만 가면 내릴 것이니 깊숙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될 수 있으면 문 옆 좌석과 맞닿는 곳에 기대어 서 있으면 편하다. 가방 안에서 책 한권을 끄집어낸다.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 멋지다! 프랑스 전역을 누비던 레지스탕스 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랑과 섹스는 같은 것인가? 섹스와 짝짓기는 다른 것인가? 사랑과 짝짓기는 같은 것인가? [짝짓기하다 죽어 버려라]. 수컷 거미의 삶! 하루살이의 삶! 복상사! [사랑하다 죽어 버려라]가 좀 더 있어 보인다.

 

잠실철교를 지난다. 철컹철컹 철컹철컹! 철교를 지날 때 철제 바퀴와 철제 레일이 철제 교각과 협조하여 만들어내는 파열음이 좋다. 성수역에 다다른다. 내린다. 오늘은 운 좋게 신설동행 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어미 새가 먹이를 토해 새끼에게 먹이 듯 한 움큼의 사람들이 튕겨져 나왔다가 우르르 빨려든다. 출발! 여유롭다. 드문드문 앉을 자리가 보인다. 그러나 서서 가는 것이 편하다. 장안철교를 지난다. 철컹철컹! 아쉽다.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런데 섹스 없이도 사랑이 가능할까?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고 결혼의 축복이 새 생명이라면. 섹스 없이는 사랑의 결실도 축복도 없다. 체외수정, 시험관 아기. 몇 페이지를 뒤적인다. 시인이라는 것이 지 꼴리는 데로 시부렁거린 것을 내 어찌 알 수 있으랴. 뭐 구지 알 필요도 없다.

 

신설동역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가방을 맨 학생들이 이리 저리 휩쓸린다. 단과학원이 밀집되어 있는 신설동은 왠지 어둡고 서늘한 느낌이다.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 담배 연기가 입김과 합쳐져 더욱 짙은 흰 연기를 만들며 공중으로 산개한다. 이곳에서는 나의 최종 목적지인 중랑교를 지나는 버스가 많다. 잠깐 고민. 아직 시간이 있다. 이번 버스는 그냥 보낸다. 아직 장초이지 않은가!

 

버스가 중랑교를 지나며 벨을 누른다. 버스 기사와 나만의 은밀한 약속. 저 내려요~~ 도로를 건너 반대편 인도를 통해 버스가 지나왔던 중랑교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횡단보도는 족히 30미터는 더 가야 하는데.... 적당히 무단횡단. 그러기에는 차가 너무 많다. 오늘도 무단횡단의 꿈은 뒤로하고 초록색 보행등을 안전망 삼아 길을 건넌다.

 

3층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이곳에서 거주하는 10여명의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해 자원봉사 해 주시는 아주머니의 따뜻한 밥상이다. 맛있다. 함께 하는 밥상은 언제나 침샘을 자극한다. 교감쌤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접근한다.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음에 분명하다. 밥에 집중한다.

송선생!’제길. 언제나 비관적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상대는 결정적 한 방을 먹이기 전 잽을 던진다.

추운데, 어떻게 왔어요.’화답한다. 전철타고 버스타고 왔지요.’당시 유행하던 응답법이다. 마치 나이스 투 미트 유하면 나이스 투 미트 유 투하듯이.

하하하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재미있어 하며 웃어준다. 부탁할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 새로운 학생이 왔는데, 아직 한글이 서툴러서 특별 개인지도가 필요할 것 같아요. 송선생 화요일과 토요일에 오시니깐 수업 전 한 시간 정도 개별 지도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정도 부탁이야 오케이다.

, 그럼요! 어떤 학생인데요.’야학의 학생들은 장년층이 주를 이룬다. 종종 배움의 기회를 놓친 청년들이나 정규교육과정에서 배제된 청소년들이 있기도 하지만 드물다. 아주머니일까, 아저씨, 아니면 할머니?

‘20대 청년이에요. 어려서 공장에서 일을 하느라 국민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고 하네요.’~~ 안타깝다.

어떤 과목을 맡을까요?’세상이 평등치 못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요즘도 국민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일이 있다니.

국어는 정선미 선생님이 해 주시고, 사회는 이영준 선생님이 해 주시기로 했으니 송선생님은 산수를 맡아 주실래요?’국민학교 과정이니 부담도 없다.

! 그럴께요. 오늘 오셨나요?’누군가에게 특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교감신경계를 흥분시키는 일이다.

지금 2층 교무실에서 교재를 살펴보고 있어요. 식사 하시고 내려가 보시면 될 것 같아요.’빨리 만나보고 싶다.

! 금방 먹고 내려갈께요.’

 

겉보기에도 나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릴 것 같은 청년이 앉아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교사 송대용이라고 해요.’반갑게 인사하며 악수를 청한다.

~~ ! 안녕하세요. 저는 김광석이라고 합니다.’맞잡은 손이 따스하다.

교감쌤께 말씀은 들었어요. 제가 화요일하고 토요일에 야학에 오니깐요 화요일 7시부터 8시까지 한 시간 정도, 그리고 토요일 2시부터 3시까지 한 시간 정도 광석씨를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웃는 인상이 참으로 선해 보인다.

저야 선생님께서 시간을 내 주시면 너무 고맙지요.’좀 친해지면 술 한 잔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좋아요. 제가 산수를 맡기로 했는데 혹시 교재는 좀 보셨나요. 선택하신 것이 있으세요?’아무리 국민학교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어도 사회생활도 하고 했으니 3~4학년 과정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아 의도를 물어본다.

선생님! 제가 아직 더하기 빼기도 어려워서요.’당황스럽다. 더하기 빼기는 엄마 무릎에서 손가락 가지고 마스터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요~~ 그럼 광석씨에게 적절한 교재를 고를 수 있게 몇 가지 문제를 드릴께요. 45 더하기 38은 얼마일까요?’종이에 커다랗게 45 + 38을 쓰고 광석씨 앞에 내민다.

‘.... 아직 이런 것은...’~~ 당황스럽니다. 혹시 수치심을 준 것은 아닐지. 우선 교재는 필요 없을 것 같다.

~~ 그럼 일에서 십까지는 셀 줄 아시지요?’설마.

!’다행이다.

그럼 기본적인 산수 몇 가지를 오늘 같이 해 봐요. 여기 빨간색 공 3개와 파란색 공 4개가 있어요. 둘이 합치면 총 몇 개일까요?’종이에 빨간색 동그라미 3개와 파란색 동그라미 4개를 그리고 광석씨에게 내 보인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하나하나 세어간다.

괜찮아요~ 그렇게 하시면 되요.’용기를 준다.

일곱 개요.’정답.

잘 하셨어요.’이번에는 종이에 파란색 동그라미 6개를 그리고 빨간색 동그라미 3개를 그린 후 묻는다.

그럼 파란색 공 6개가 있고 빨간색 공 3개가 있는데 파란색공 2개를 뺐어요. 그럼 어떤 공이 몇 개 남을까요.’어려울까? 파란색 동그라미 2개 위에 엑스표를 해 주며 힌트를 줄까. 시간이 좀 흐른다. 조마조마. 그리고 나의 머리를 때리는 답변이 돌아온다.

선생님! 제가 색을 몰라요!’그 날이 광석씨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었다.